<초기불교에서 바라본 창조론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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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보림사 댓글 0건 조회 821회 작성일 21-03-21 12:32본문
<초기불교에서 바라본 창조론 下>
-불교적 우주관으로 보는 신
『디가니까야』에 62 가지 사견 중에 일부영속, 일부비영속이라고 하는 사견이 나와 있습니다. 대범천이라는 존재는 영원하다고 생각하고 자기들은 죽었잖아요. 원래 있던 존재는 창조주이고 자기들은 피조물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이 존재들에 의해서 종교가 형성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말씀드렸다시피 대범천의 수명은 일 대겁이에요. 일 대겁이 길기는 하지만 대범천도 결국 일 겁이 지나면 죽어야 한다는 거예요.『맛지마니까야』에 ‘바까범천경’이 있어요. 바까baka라는 범천이 태어나면 수명이 거의 우주 하나가 생겨나서 멸망하는 시간이니까 얼마나 길어요. 그런데 너무 오래 살다보니까 자신이 영원한 존재이고 견고하고 유일한 존재라는 어리석음이 생겨요.
부처님께서는 이런 범천들이 스스로 창조주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무명에 휩싸여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색계 범천이 수명이 길지만 영원하진 않아요. 불로 멸망할 때는 깨지잖아요. 아무리 긴 수명을 가진 존재라 하더라도 결국 무상하고 거기서 죽어서 다시 범천에 태어날 수도 있고 더 좋은 세상에 태어날 수도 있지만 인간계나 욕계에 태어나서 다시 윤회의 괴로움을 겪을 수도 있어요. 사실 범천의 세월이 너무 길기 때문에 스스로 오만함에 빠져 자신이 영원히 살고 창조주라고 생각하고 그 추종자들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적어도 불교에서는 그런 신들조차도 결국은 유한한 수명을 가지고 있고 죽으면 다시 어디로 윤회할지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불교적인 우주관에서 볼 때는 아무리 수승하고 능력 있는 신이라도 영원하지 않고 완전한 해탈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거예요.
한 우주가 형성되어 살 동안에는 영원하다고 큰소리칠지 모르겠지만 세월이 지나면 그 존재는 다른 곳으로 윤회해야 합니다. 번뇌가 남아있는 한 그 번뇌가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불교에서는 신이라고 하는 것도 엄밀한 의미에서 중생으로 봅니다. 해탈한 존재가 아니라는 거죠. 이런 존재들은 아직 번뇌가 남아 있기 때문에 자만을 일으키는 거잖아요. 자신이 영원하다고 생각하고 영원하지 않은 것을 영원하다고 생각하는 건 어리석음이고요. 불교에서 말하는 무명과 무지거든요. 부처님께서는 아무리 수승하고 아무리 좋은 세상에 태어나도 본질적으로 무상하기 때문에 그걸 의지처로 삼거나 그런 것을 위해서 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이런 삼계라고 하는 세상조차도 무상하다고 하셨지요.
-삼계를 벗어나는 길
‘불타오름경’을 보면 삼계도 불타고 있다고 해요. 삼계화택三界火宅이라는 말 들어보셨죠. 삼계가 탐진치貪瞋癡로 불타고 있다는 거예요. 아무리 멋지고 좋은 세상에 살고 수명이 길어도 탐진치가 남아있는 존재는 번뇌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겁니다. 우연히 좋은 곳에 태어나 행복을 누릴 수도 있지만 그것이 끝났을 때는 번뇌가 어디로 튈지 모르기 때문에 해탈이라고 할 수 없고, 의지할 만한 곳이라고 할 수 없고, 귀의처라고 할 수도 없다는 거예요. 부처님께서는 범천에 태어나서 신이 되라고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아무리 뛰어난 세상조차도 영원하지 않고 거기 사는 존재들도 번뇌가 남아있는 한 다시 악처에 태어날 가능성을 항상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명확히 이해해서 수명이 길고 뛰어난 과보를 가진 곳에 태어나기를 바라기보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그냥 번뇌를 버리는 것이 진정한 행복의 길이라고 하셨죠. 이게 바로 출세간이고 삼계를 벗어나는 겁니다.
우리가 번뇌가 있는 한 좋은 데 태어나거나 나쁜 데 태어나는 것의 차이 뿐이지 삼계를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수행을 해서 번뇌를 벗어나면 삼계를 완전히 벗어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해주고자 하는 이야기입니다. 『디가니까야』의 다른 경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당신이 이런 법을 깨닫기 전에는 다른 존재들에게 유일하게 해줄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색계나 아주 좋은 세상에 태어나게 하는 정도밖에 할 수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세상에 태어나도록 가르치는 건 할 수 있지만 이 삼계로부터 벗어나는 가르침은 제가 보기엔 사실 불교밖에 없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천국이나 극락도 영원하지 않고 무너지는 세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삼계를 벗어나는 것을 추구해야지 좋은 세상에 태어나고자 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거예요.
모든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잘못된 생각들을『디가니까야』에서 62 가지 사견으로 설명했는데 이걸 견해의 그물이라고 합니다. 여기를 빠져나갈 고기는 없다는 거예요. 일반적으로 다른 종교에서 조물주가 뭔가를 만들었다고 하는 창조론에 대해서 불교에서는 이런 식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이 불자로서 자부심을 가질 필요가 있어요. 불교는 여러분의 상상 이상으로 스케일이 보통 스케일이 아닙니다. 우주관도 그렇고 법에 대한 깊이와 수준, 부처님 가르침의 심오함은 다른 곳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어요.
그런데 이런 심오하고 깊이 있는 가르침은 내팽개치고 다른 데처럼 신을 쫓아가고 누구한테 구걸하는 기도가 너무 주된 게 되어버리면 불교가 천박해져버립니다. 이것이 불필요하다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불교가 너무 깊이 있고 심오하고 광대한 스케일을 가진 가르침인데 무슨 무당들의 가르침 같은 식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거예요. 저는 사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불교에 대해서 좀 황당한 종교라고 생각할 수도 있거든요. 하지만 여러분이 불교에 대해서 좀 더 자부심을 가지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더 관심을 가지라는 의미에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혹시 불교의 우주관이나 다른 것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으면 말씀해보세요.
<질문>
거사님: 천상계에 올라가는 것을 바라지 말고 인간으로 태어나 수행을 많이 해야 계속 수행이 가능하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으신데요. 적당히 해서 천상에 안 올라가고 인간계에 계속 윤회할 수 있는 정도만 계속하는 게 나은 건지요?
스님 : 우리가 윤회하는 데에는 두 가지 조건이 있어요. 하나는 똑같은 업을 지어도 내가 어디를 원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가 있습니다. 원력을 어디로 세우느냐에 따라서요. 그러니까 자신이 선업을 엄청 많이 지었다 하더라도 그 선업을 바탕으로 천상계에 태어나고 싶다고 하면 선업이 충분하기 때문에 태어날 수 있어요.
그런데 천상계에 태어나면 수행하기 힘듭니다. 왜냐하면 거기엔 너무 즐거운 일이 많고 누릴 게 많아서 수행하는 데 방해가 된다는 거죠. 출가만 보더라도 부자들이 출가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거든요. 지식인들 중에 출가하는 경우는 많지만요. 의외로 우리 조계종에 제일 많은 게 서울대출신입니다. 지식인들이 오히려 눈치가 빠른 거죠. ‘아, 여기 빨리 가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하고요. 그런데 일반적으로 큰 부자들이 출가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어요. 재물을 가지고 할 일도 너무 많고 누릴 것도 너무 많기 때문에 그걸 버리고 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천상계가면 누릴 게 너무 많은 거예요. 예쁜 여자가 천지고 주위가 전부 욕망 누릴 거예요. 그래서 욕계 천상에 있는 존재들이 죽는 원인 중의 하나가 굶어죽는 거랍니다. 너무 재밌어서 놀다가 먹는 걸 잊어버려서 굶어죽는다고 해요. 마치 게임하다가 죽는 거랑 비슷합니다.
그래서 진짜 수행자들은 천상에 태어날 복력이 충분해도 일부러 인간계에 태어나려고 합니다. 수행을 하기 위해서요. 수행으로 좀 더 바라밀을 쌓으려는 거지요. 그리고 인간세상에서 제일 바라밀을 많이 쌓을 수 있거든요. 천상계는 다 갖춰져 있어서 별로 필요한 게 없어요. 보시하기도 마땅치 않지요. 그런데 인간계는 보시할 기회도 많고 공덕을 쌓을 기회도 많고 수행하기도 적당하지요. 수행할 때는 약간 적당한 고통도 있어야 합니다. 고통 없이 너무 편하면 수행에 대한 발심이 잘 안 일어날 수 있거든요. 그래서 보통 수행자들이 인간계에 태어나는 걸 원하는데 말씀드렸다시피 원력하고 관계가 있어요. 똑같은 업을 지어도 자신이 태어나고자 하는 열망에 의해 태어난다는 거죠.
두 가지 조건이 다 필요해요. 첫째는 자기열망, 둘째는 이 열망을 충족시키는 업이 있어야 합니다. 평생 사람을 죽이고 나쁜 짓만 한 사람이 천상계에 태어나고 싶다고 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이건 업의 힘이 악처로 갈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이 열망을 뒷받침해줄 선업이 충분하면 자신의 원대로 돼요. 어떤 사람은 선업을 많이 짓고 다음 생애에 부자고 되고 싶다고 하면 부자가 됩니다. 그런데 선업을 많이 지었지만 다음 생에 수행자가 되겠다고 하면 수행자의 길로 갑니다.
거사님 : 그럼 가장 좋은 건 수행자는 수행자가 되는 건가요?
스님 : 그게 최고로 좋죠. 세상에 뭔가 있는 것처럼 우리가 헐떡거리며 쫓아가지만 막상 가보면 무지개처럼 또 저 멀리 가있거든요. 그게 인간사예요. 저기에 가면 행복이 있을 것 같아서 막 쫓아가보지만 막상 가보면 알맹이도 없고 껍데기만 남아있죠. 이런 마음들 때문에 끊임없이 쫓아가는 건데 이 마음을 멈추면 가만히 있어도 행복이 온다는 걸 아는 게 수행자의 삶이거든요.
그러니까 정말 수행을 많이 한 사람들은 보통 죽을 때 원이 다음 생에도 어린 나이에 출가하고 다음 생에도 출가자로 삶을 살겠다는 겁니다. 제대로 수행한 사람이면 대부분 아마 이런 원을 세울 겁니다.
보살님 : 스님, 수다원이 되면 일곱 번 정도 태어난다고 하셨잖아요. 수행을 하면서 수다원까지 되어야겠다는 원을 세워도 되는 건가요?
스님 :당연히 되죠.
보살님 : 그러면 또 일곱 번을 태어나면 수행자로...
스님 : 그건 보살님이 수행자로 태어나고 싶지 않아도, 예를 들어서 보살님이 수다원이 되겠다는 원을 세우고 만약에 수다원이 됐다면 걱정할 게 없어요. 수다원은 열반행 티켓을 벌써 받은 사람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수행자가 평지와 오르막을 왔다갔다한다면 수다원이 된 존재는 내리막길이에요.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수다원이 된 존재는 아무리 놀아도 일곱 생이에요. 자신이 수다원이 되었는데 ‘아, 나는 수다원이 싫다. 다시 중생으로 돌아갈래.’ 한다 해서 돌아가는 게 아닙니다. 수다원이 된 존재는 아무리 늦어도 무조건 일곱 생 내로 아라한이 됩니다 그것이 수다원이고, 수다원이 된 존재부터는 쉽게 말해서 불퇴전입니다. 여기서부터는 뒤로 후퇴하는 법은 절대 없어요. 수다원이 되기 전까지는 아무리 수행을 잘하다가도 한 생각 잘못하면 완전 퇴보할 수도 있거든요.
옛날에 사리불존자가 그랬다고 하잖아요. 한참 수행하다가 어느 천신이 수행력을 시험하려고 와서 “너, 보시행 잘한다는데 눈 하나 빼줘.”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당연히 빼드리죠.” 하고 눈을 쓱 빼줬어요. 그러자 천신이 그 자리에서 눈알을 밟아서 비비는 거예요. 이때 ‘이런 놈을 위해서 내가 보시를 해야 하나.’하고 화가 일어나서 엄청 오랜 세월 퇴보했다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수행자들은 바라밀을 닦는 과정에서 퇴보하기도 하고 그래요. 나중에 부처님 일대기를 공부해보시면 알겠지만 부처님께서도 항상 선처에만 태어나신 건 아니거든요. 바라밀 기간 중에 가끔은 동물의 몸을 받기도 하셨어요. 사슴왕으로 태어나신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그 대신에 항상 남자나 숫컷으로만 태어난다고 해요. 이런 건 나중에 공부를 해보시면 될 거예요. 그러니까 수다원이 되기 전까지는 언제나 퇴보라는 게 가능하다는 거예요. 방심하면 그렇게 될 수도 있어요. 그 정도 되면 방심은 잘 안하지만요. 수다원이 된 존재는 본인 스스로가 방심을 할 수가 없고 절대로 퇴보라는 게 없습니다. 그리고 결국 불교라는 것이 괴로움의 소멸인데, 보통 중생들의 괴로움을 지구상의 흙이라고 한다면 수다원에게 남아있는 괴로움은 손톱 위의 흙 정도밖에 안 된다는 거예요. 거의 다 온 거죠. 보살님, 이 생애 꼭 수다원이 되세요.
거사님 : 창조론에 대한 설명은 잘 들었는데요. 혹시 진화론에 대해서도 62 가지 사견 중에 하나로 되어있는지요 그 언급이 되어있는지요?
스님 : 진화론은 사견이 아니잖아요. 진화론은 사실이지요. 환경과 조건에 맞게 변화하고 사람이 진화한다는 건 틀린 말이 아니잖아요. 사견이라는 건 틀린 이야기를 하는 거거든요.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이라고 믿는 것, 잘못된 걸 믿는 걸 사견이라고 해요. 그래서 진화론에 대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보살님 : 부처님의 ‘오도송’ 중에서 ‘집을 짓는 자를 찾아 헤매었’다고 나오는데 여기에서 집을 짓는 자는 무슨 뜻이에요?
스님 : 집을 짓는 자는 일종의 갈애를 의미한다고 생각하시면 될 거예요. 실제로 무슨 집을 짓는 자가 있는 건 아니고요. 우리가 계속 오온을 형성하게 하는 것이 집을 짓는 거거든요. 오온을 계속 만들어내는 것, 이건 누가 만들어내겠어요? 아까 말했던 조물주가 하는 게 아니라니까 조물주가 아니라 이건 자기 업에 의해서 만들어낸다는 거죠. 업과 자기가 지은 업이라는 조건이 있어야 돼요. 아까 제가 말한 두 가지 조건이 이거예요. 첫째는 업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이에 대한 갈애가 있어야 해요. 부처님 가르침에 의하면 이 두 가지 조건이 있어야 태어남이 있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다시 오온이 형성되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건 갈애입니다. 갈애와 업, 이 두 가지가 작용을 하는 거죠.
거사님 : 아까 말씀하실 때 우주가 멸망하면 지옥중생들이 갈 데가 없어서 광음천으로 간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인연과에 맞지 않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스님 : 갈 데가 없어서 거기 간다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중생들이 살면서 셀 수 없는 과거 전생부터 윤회를 해왔잖아요. 그 중에서 한번이라도 선업을 지은 건 있겠지요. 뭔가 잠깐이라도 지은 선업이 있을 수 있는데, 그 상황이 되면 그 선업이 작용을 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갈데없으니까 너는 저기 가라.’ 이런 게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가 과거생에 지은 업들이 얼마나 많겠어요. 그 많은 업 중에서 현재 조건을 얻어야 결과를 맺거든요. 조건이 성숙해야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데 그런 상황이 되면 다른 악업들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조건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쪽의 사람들도 다시 선처로 태어나서 거기서 수행을 해서 광음천으로 태어난다는 거죠. 일단은 선처에 태어나야 삼매를 닦을 수 있잖아요. 축생들은 삼매에 들 수 없거든요. 축생의 몸을 가지고는 지혜가 없기 때문에 수행을 할 수가 없어요. 그건 한계가 있어요. 축생들도 그냥 복 짓는 정도는 할 수 있어요. 원숭이가 부처님한테 꿀을 공양해서 다음 생애에 천상에 태어난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이런 건 가능한데 축생의 몸을 가지고 어떻게 수행을 하고 연기를 이해하겠어요. 안 된다는 거죠. 그래서 보통 그런 경우는 과거생에 지은 업 중에 하나, 선업 중의 하나가 결과를 맺는다고 이야기를 해요. 이해되시죠?
그리고 네 가지 알 수 없는 게 있어요. 네 가지 생각하지 말라고 한 건 우리가 머리로서 접근할 수 없단 이야기입니다. 부처님이 깨달은 경계는 우리가 사유로 알 수 없다는 거예요. 부처님께서 뭐라고 하셨나하면 ‘이런 건 사유하지 마라. 잘못하면 미친다.’ 이러셨어요. 그러니까 부처님이 깨달은 경지는 일반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영역이라는 거예요. 또 두 번째가 선정에 든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선정에 든 사람의 마음상태는 머리로서 헤아릴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죠. 세 번째는 업과 업의 과보, 이건 부처님의 영역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대략적인 것뿐이고 아주 세세한 것이 과보를 어떻게 맺는지는 부처님의 영역이라고 해요. 또 한 가지가 지금 정확하게 기억나는 건 아닌데, 하여튼 네 가지가 있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과거에 지었던 업이 현재 어떤 결과를 맺고 정확하게 어떻게 되는지는 알 수 없어요.
부처님께서 등이 아프셨잖아요. 부처님께서 전생에 레슬링선수였다고 그래요. 그때 부처님이 상대 허리를 꺾어서 그 과보로 등이 아프셨던 거예요. 그런데 이런 걸 부처님이 아니고서는 정확하게 그 원인을 알기는 어렵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냥 짐작하는 거라고 할 수 있고 좀 더 굵직한 건 알 수 있어요. 전생에 어떤 업에 의해서 태어났는지 이런 건 주된 업이기 때문에 수행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주 사소한 것들이 어떤 것에 의해서 과보를 맺는지 이런 것까지 알기는 어려워요.
거사님 : 보시의 공덕에 대해서 잠깐 여쭤보고 싶어요. 일반 사람에게 보시하는 것은 약간의 공덕이 있고 아라한에게 하는 건 무한공덕이 있다고 하는데 어차피 원인과 결과라면 거의 비슷할 텐데 왜 그렇게 공덕이 차이가 있는지요?
스님 : 아라한의 이름 중 하나가 공양받을 만한 마땅한 가치가 있는 분이라고 이야기하잖아요. 그런데 왜 그렇냐고 하면 사실 뭐라고 이야기하기는 어려워요. 그런데 부처님께서 관찰해보고 지혜의 눈으로 봤을 때, 번뇌를 버렸거나 번뇌를 버리는 중인 존재에게 보시를 하는 것이 과보가 훨씬 크다는 거죠. 그 존재가 좀 더 정신적으로 수승할수록 과보가 돌아오는 힘이 훨씬 크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왜 그런지는 저도 사실 딱 부러지게 이야기하기에는 쉽지 않아요. 또 왜 그게 그런 과보가 일어나느냐고 물으면 할 말도 없거든요.
세상의 진리라는 게 부처님도 왜 이렇게 구성됐는지 말씀하기시보다 이런 세상이 구성되어 진리를 발견하신 거잖아요. 부처님이 이런 걸 만들었다기보다는 그냥 세상이 이렇게 흘러가고 마음이 이렇게 움직이는 걸 관찰을 통해 발견하신 거지 왜 그렇냐고 하면 사실 부처님도 답하시기 좀 어려울 거예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약간 오해하는 게 있어요. 가난한 자에게 보시하는 게 부처님한테 보시하는 것보다 낫다고 이야기하기도 하잖아요. 물론 이 말이 좋은 말이기는 한데요. 실제로 그렇지는 않아요.『맛지마니까야』에서 ‘보시의 분석경’을 보면 일반 범부한테 하는 보시보다는 수행을 많이 한 사람에게 하는 게 과보가 훨씬 큽니다. 특히 성자에게 하는 보시는 셀 수 없는 과보가 있다고 하죠. 일반인에게 하는 보시보다 계를 잘 지키는 사람에게 하는 게 10 만배 정도 된다고 언급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이건 약간 시적인 표현이라고 봐야지 실제로 가난한 사람에게 하는 보시가 부처님한테 하는 보시보다 과보가 큰 건 아닙니다. 가난한 분들한테도 보시를 많이 하라는 의미에서 이렇게 표현을 한 것이지 실제로 그렇지는 않아요.
개인에게 하는 보시의 경우는 보시를 받는 사람의 정신적인 수준이 높을수록 과보는 커집니다. 정신적인 수준이 높다는 건 탐욕이나 성냄이나 어리석음이 얼마나 사라졌는지 얼마나 적은지에 따라서 과보가 차이가 나고요. 부처님한테 보시하는 것보다 더 큰 과보가 있다면 승가에 하는 보시입니다. 부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승가에 보시를 하면 나와 모든 스님들한테 보시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더 큰 과보가 있다’고 이야기하셨죠.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맛지마니까야』의 ‘보시의 분석경’이라는 경을 읽어보세요. 보시를 했을 때 의 과보가 어떻게 되는지 자세하게 나옵니다.
거사님 : 세속적으로 운칠기삼運七氣三이라는 말이 있는데, 운이 좋은 분은 세상일에 성공하고 운이 없으면 실패한다고 보는 건 연기적인 관점에서는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인가요?
스님 : 그렇지는 않아요. 완전히 근거 없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게 전생에 쌓은 복이 많은 사람들은 쉽게 일이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자기 실력에 비해서 복력이 약한 사람들은 복력이 잘 뒷받침을 못해줘서 자기 역량을 잘 발휘 못하는 경우도 있어요. 이건 운하고는 좀 다른 의미예요. 자신이 전생에 지었던 복력과 관계가 있어요. 재수와 운이라는 건 자기가 한 것도 없이 우연히 된 걸 이야기하잖아요. 운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건 사실 불교적인 관점에서는 안 맞아요. 그런데 세속에서 뭘 해도 남들보다 쉽게 되고 일만하면 잘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이런 사람들은 약간 지혜가 있거나 전생에 쌓은 복력이 있거나 둘 중에 하나입니다.
또 세상에 잔머리가 많은 사람들이 있잖아요. 세속적으로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들은 지금 당장은 잘되는 것 같아도 멀리 보면 분명히 결말은 별로 안 좋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걸 요약하자면, 복력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수품을 잘 얻게 만들고 좋은 사람을 만나게 해주는 효과가 있대요. 또 얼굴도 몸도 건강하게 만들고요. 그런데 지혜가 있는 사람은 자기 운명을 바꿀 수가 있어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이런 표현을 쓰셨어요. 검게 태어나서 검게 사는 사람, 검게 태어나서 희게 사는 사람, 희게 태어나서 검게 사는 사람, 다음에 희게 태어나서 희게 사는 사람으로요. 태어날 때 복력은 좀 약해도 열심히 노력해서 성공한 사람도 있잖아요. 이런 사람은 검게 태어나서 희게 사는 사람이고요. 태어날 때는 많은 걸 갖추고 태어났지만 방심하다가 말년에 쫄딱 망하는 사람, 오히려 안 좋게 되는 사람은 희게 태어나서 검게 사는 사람이고, 태어날 때도 박복하게 태어났는데 살면서 자기를 비난하고 세상을 비관해서 더 안 좋은 쪽으로 가는 사람은 검게 태어나서 검게 가는 거라고 할 수 있지요.
사실 태어날 때 가지고 오는 것도 무시할 수는 없어요. 그렇지만 그것도 자기가 만든 거예요. 자기가 지은 업과 업에 의한 과보니까요. 그러나 현생의 노력에 의해서 이 상황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이 수행을 한다 하더라도 복도 많이 지어야 해요. 지혜만 있고 복력이 약하면 아까 말했듯이 능력은 있지만 뭔가 하려고 하면 좀 잘 안 되는 경우가 있어요. 자꾸 주변 상황이 안 좋은 쪽으로 만들어지고 뭘 하려고 하면 자꾸 망가지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래서 복도 적당히 지어야 해요.
사실 복과 지혜는 약간 다른 관점이거든요. 그런데 둘 다 없으면 인생 사는 게 진짜 힘들어요. 적어도 둘 중에 하나는 있어야 합니다. 복이 많으면 지혜 있는 사람을 옆에 두면 되거든요. 그 복력을 가지고 지혜 있는 사람을 옆에 두면 돼요. 또한 지혜가 있는 사람은 자기가 복을 만들어갈 수 있어요. 그러나 둘 다 없는 사람은 뭔가 하려고 할수록 늪에 빠지게 될 수 있거든요. 자신이 둘 다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열심히 노력을 해서 메워야 합니다. 복도 짓고, 지혜도 계속 계발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오늘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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