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대한 알아차림과 호흡수행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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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보림사 댓글 0건 조회 907회 작성일 21-03-21 12:59본문
<몸에 대한 알아차림과 호흡수행 上>
-사띠sati의 어원과 번역
오늘은 사띠sati라는 것과 호흡수행의 관계에 대해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사띠라는 것에 대해서 조금 다른 각도에서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사띠는 불교에서 제일 중요한 용어 중에 하나고 ‘대념처경’에서는 가장 중요한 단어인데요. 사띠라는 단어에 대해서 우리나라에서 다양하게 번역들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번역들을 관찰해보고 어떤 용어를 선택해야 할지 고민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다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정확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 여러 가지 용어로 많이 번역이 되고 있지만 어떤 것이 원래의 사띠라는 뜻에 좀 더 가깝고 수행적인 측면에서 폭넓은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는지 먼저 설명을 드릴게요. 사띠에 대한 설명이 여러 각도에서 이해되면 실제 수행에서 사띠가 어떤 식으로 작용되는지 이해하기 쉬울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띠의 어원을 먼저 살펴보지요. 사띠는 ‘사라띠sarati’라는 빠알리어 동사에서 온 파생명사입니다. 어원인 사라띠에는 ‘기억하다’라는 뜻이 있어요. 산스크리트어로는 ‘스므르티smrti’라고 하는데 ‘기억’이라는 뜻이 있어요. ‘기억하다’에서 나온 ‘기억’이라는 뜻으로 사띠가 가지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뜻은 기억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나 서양에서 번역할 때 원래 사띠가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의미보다는 수행의 기법에 중점을 두고 번역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실제 현재에 집중하고 현재에 마음을 두고 주의를 기울이는 걸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번역을 했다는 거지요. 사띠가 원래 가지고 있는 풍부한 뜻보다는 좀 더 전문화됐다고 볼 수도 있고 어느 한 부분에 너무 집중되어 있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는 사띠의 개념을 새롭게 조명해서 보편적인 의미로 이해하게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할 것 같아요. 저의 경험으로 보면 한 몇 년을 공부하신 분들도 사띠라는 의미에 대해서 계속 헷갈리고 계속 혼란을 겪고 좀 알았다 싶다가도 좀 지나면 또 헷갈리는 경우가 많더군요. 이렇게 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번역의 영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사띠는 주로 미얀마의 위빠사나 센터에서 주로 하는 것, 또 서양의 심리학에서 심리치료기법으로 사용하는 것으로 많이 소개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분야에서 쓰던 용어들도 함께 들어왔지요. 예를 들어 영어로 사띠를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라고 번역하는데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란 현재 순간에 판단하지 않고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라고 보통 설명을 하거든요. 이게 존 카밧진Jon Kabat-Zinn 교수가 한 정의입니다. 매 순간의 경험에 완전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으로 마인드풀니스를 설명하죠.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마음챙김이라고 번역을 많이 하지요. 대상을 챙긴다는 의미에서 마음챙김이라고 번역을 했고, 또 알아차림이라는 번역도 많이 쓰고. 전재성 교수는 새김이라고 썼습니다. 새김이라는 번역은 기억이라는 뜻을 가진 원어에 가장 가까운 번역이에요. 그리고 깨어있다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사띠의 의미와 번역의 차이점들
그런데 우리가 사띠라는 용어를 이해할 때 한 번 살펴봐야 할 게 있어요. 경전에 보면 사띠라는 것이 있고 삼빠자나sampajana라는 게 있거든요. 삼빠자나는 지혜를 뜻하는데 사띠와 지혜는 그 역할이 분명히 다릅니다. 역할이 똑같다면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겠죠. 팔정도에서도 정견正見은 지혜의 영역이고 정념正念은 사띠라고 하거든요.
사띠의 역할과 지혜의 역할은 다릅니다. 지혜는 대상 자체를 아주 철저하게 꿰뚫어 아는 것, 그러니까 우리가 보통 안다고 하는 그런 게 아니라 특징과 역할, 원인까지 아주 속속들이 꿰뚫어 아는 걸 말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알아차림이라는 번역은 지혜, 대상에 대해서 뭔가를 포착하고 아는 측면에 중점이 맞춰진 번역이라고는 생각이 들어요. 알아차림이란 번역엔 지혜의 요소가 포함돼있는 거죠. 이것이 잘못된 번역이라는 게 아니라 뉘앙스에 이런 면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사띠의 기능에 대해서 많이 헷갈리는 것 같아요. 보통 서양에서 이야기하는 것도 사띠 고유의 특성을 드러낸다기보다는 수행을 어떻게 하느냐에 관계된 수행기법적인 측면으로 접근이 돼있거든요.
사실 부처님께서는 사띠란 개념 자체를 굉장히 단순하면서도 폭넓게 쓰셨어요. 예를 들어서 숙명통에서 전생에 우리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기억한다고 할 때도 사띠란 용어를 쓰거든요. 과거에 있었던 걸 기억하는 것도 사띠라고 쓴 거지요. 부처님께서는 어떤 단어를 선택하실 때 의미 없이 선택하는 일은 없습니다. 경전에 보면 ‘의미와 표현을 잘 구족한’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어떤 의미를 잘 담고 있고 표현이 잘 되었다는 건데 부처님께서는 굉장히 정확하고 적합한 언어를 쓰셨죠.
그런데 사띠를 기억이라는 뜻으로 쓰고 기억이라는 뜻에 의해서 실제 현실에 드러날 때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다는 것을 설명을 하는 거는 괜찮은데 너무 한쪽 측면만을 이야기하면 원래 사띠가 가지고 있는 의미가 상당히 축소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 순간의 ‘알아차림’이라고만 하면 과거의 것을 기억한다는 의미는 전혀 드러나질 않거든요. 수행적인 측면에서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것, 현재 일어나는 대상을 잘 알아차린다는 의미는 있지만 과거에 있었던 기억이라는 측면은 거의 없어지게 되는 거죠. 그리고 ‘마음챙긴다’는 것에도 기억이라는 의미는 상당히 희미해져버립니다.
-바른 기억이라는 번역에 대해
사실 수많은 스님들이 사띠에 대한 정확한 번역어를 찾으려 시도하고 적합한 단어에 대해 고심했습니다. 사띠를 단순히 기억이라고 번역하기엔 너무 평범하잖아요. 그래서 좀 더 세련되고 좀 더 의미를 잘 드러내는 단어에 대해 고민들이 많이 있었지요. 그런데 어떻게 보면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깊이 있는 것이고 가장 최선의 선택일 때가 있거든요. 물론 좀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그래서 제가 생각할 때는 사띠를 ‘바른 기억’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가장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중국에서는 사띠를 정념으로 번역했습니다. 여기에 쓰인 념念을 보통 생각이라는 뜻으로 알고 있는데 념念자에는 기억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한자사전을 찾아보면 생각 념에 기억이라는 뜻이 나와 있어요. 그리고 ‘아비달마 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 Abhidharmakosa’ 등에선 정념으로 번역하지 않고 억념憶念이라고 나옵니다. 기억할 억憶자에 생각 념念자를 쓰지요. 국어사전에서 억념이라는 단어를 찾으면 ‘단단히 기억하여 잊지 않음’이라고 설명이 돼 있어요. 그러니까 억념이라는 말은 어떤 대상을 단단히 기억하고 명확히 기억한다는 뜻이겠지요. 생각 념자를 썼다고 옛날 어른들이 ‘바른 생각’으로 번역한 경우도 많이 있었지만 ‘바른 생각’은 ‘정사유正思惟’입니다. 정사유가 생각이고 정념은 다른 의미예요. 중국에서도 사띠를 기억으로 번역한 것 같아요. 정념을 그냥 생각으로 번역하지는 않았을 거거든요. 생각 념念자가 지금 금今자에 마음 심心자를 쓰잖아요. 그래서 현재 마음을 알아차리는 거라고 해석하는 스님들이 있는데 아주 단순하게 들여다봅시다. 생각 념에 기억하다는 뜻이 있죠. 억념이라는 말을 썼다면 이건 기억이라는 뜻으로 썼다는 거거든요. 그래서 중국에서도 사실 사띠를 ‘바른 기억’으로 번역한 겁니다. 비구보디스님이 처음에 사띠를 mindfulness로 번역을 했어요. 여러분이 영어로 된 경전 같은 걸 보면 다 사띠가 mindfulness로 되어 있을 거예요. 그런데 최근에 질의응답을 보면 당신이 mindfulness로 번역한 것이 적당하지 않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오히려 memorize 또는 memory, 기억으로 번역하는 것이 맞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더군요. 또 다른 학자 한 분도 경전 전반적인 분위기를 봐서는 사띠를 기억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는 ‘바른 기억’이라는 번역이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이 들어요. 번역이 이렇게 되면 여러분이 사띠를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어요. 기억이란 말은 또 다른 말로 하면 ‘잊지 않음’, ‘불망不忘’이잖아요. 기억한다는 것은 이렇게 어떤 것을 잊지 않고 머릿속에 기억을 한다는 말이지요.
주석서에서는 기억이라는 부분에 대해서 보통 법으로 분류를 많이 하는데 법으로 봤을 때 기억을 담당하는 법은 무엇인가라는 질문들이 있어요. 불선한 법에서 기억을 담당하는 것은 산냐saññā라고 합니다. 수상행식이라고 할 때 쓰는 상, 인식입니다 . 우리가 과거를 기억한다는 건 과거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거지요. 이걸 기억이라고 하는데 선한 마음에서는 사띠가 담당한다고 봅니다. 선한 마음의 기억은 사띠로 이해를 하고 있는데 사띠가 생기는 강한 원인 중하나가 강한 인식이에요. 아주 강력한 인식, strong perception, 즉 어떤 대상에 대해서 선명하게 이해를 하는 것이 기억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설명이 돼있습니다.
-바른 기억은 바른 견해를 바탕으로 한 기억
사띠의 원어의 뜻은 기억이지만 좀 전문화되어서 주석서나 수행에서 ‘떠다니지 않고 깊이 들어가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주목할 부분이 있습니다. 사실 사띠라는 것은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나오시기 전에는 중요하게 부각된 적이 없어요. 그냥 기억이라는 측면은 언제나 있었지만요.
불교에서 바른 기억이라고 하는 사띠, 삼마 사띠samma sati는 선한 법과 항상 함께하는 것들로 이해합니다. 선한 법이 있으면 사띠가 반드시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렇다면 사띠는 것은 무엇과 관계가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나시기 전엔 선과 불선을 구분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불교에서 팔정도, 칠각지, 사성제, 연기는 부처님께서 나시기 전에는 나오지 않는 법이고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나셨기 때문에 설해진 법이라고 이야기해요. 사실 주석서에서 선과 불선을 명확히 구분해서 설법을 할 수 있는 존재는 부처님밖에 없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물론 경전에는 그렇게 나오지는 않지만 경전에도 칠각지나 팔정도는 여래가 이 세상에 출현했기 때문에 설해진 법이라고 자주 나오거든요. 따라서 법이라는 것, 사띠나 팔정도의 요소들이 부처님께서 나오셨기 때문에 이 세상에 드러났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사띠라는 것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바른 견해’와 관계가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선과 불선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기억이라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사성제의 패러다임을 가진 기억이어야 바른 기억이 된다는 거죠. 만약 여러분에게 탐욕이 일어났다면 탐욕이 탐욕인 줄 꿰뚫어 아는 건 삼빠자나, 지혜입니다. 그런데 탐욕이라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파악하고 이해하고 난 다음에 이걸 우리가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게 적용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겠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법을 관찰할 때도 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한 바른 기억이 적용이 돼야 한다는 겁니다.
-사띠의 역할
여러분이 수행이 안 된다고 많이 말하는데 왜 수행이 안 되는지 아세요. 매번 들어도 집에 가면 다 잊어버리기 때문이에요. 잊어버리기 때문에 어떤 현상에 부딪치면 그 현상에 부처님의 법이 적용이 안 되는 거예요 . 지혜는 모두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법에 대해 충분하게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 약하기 때문에 막상 현상에 부딪치면 까맣게 잊어버리고 일반적인 현실로 돌아가는 거예요. 세속적인 지혜가 없는 게 아니에요. 지혜의 방향을 법으로 돌리기만 하면 엄청 빨리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에 너무 물들어있기 때문에 자꾸 엉뚱한 데로 마음이 움직여 이건 다 까맣게 잊어버립니다. 이런 쪽으로 가야된다고 정신적으로 또렷하게 기억하고 이에 대한 망각이 없어야 법이라는 거 자체에 마음이 머물 수 있는데 그렇지 않고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이런 거를 다 잊어버린다는 거죠.
이걸 잊어버리지 않도록 계속 제어하고 떠올리고 마음이 묶여 있고 정착하도록 해주는 게 바로 사띠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기억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거죠. 세속적으로 배운 사람들은 기본적인 이해력이 있으니까 들을 땐 분명히 이해를 해요. 그런데 일상생활로 돌아가면 이게 적용이 안 되는 건 다 사띠가 약해서 그런 거예요. ‘대념처경大念處經’의 념念이라는게 일종의 기억, 잊지 않는 것, 불망입니다. 이것이 확립되는 걸 처處라고 해서 념처念處라고 하는 거지요. 빳타나paṭṭhāna라는 처處를 영어로는 establishment라고 번역을 해요. 완전히 확립되고 정착되고 더 이상 물러나지 않는다는 거지요. 여러분이 어떤 경계에 부딪쳐도 사성제의 관점과 사성제의 패러다임을 잊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게 부처님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게 아라한이고 그런 사람들이 깨달음이라는 거죠. 잊어버리지 않아야 지혜가 작용할 수 있는데 자꾸 망각하기 때문에 지혜가 작용할 수가 없는 거예요.
사띠는 여러 전문화된 설명도 있을 수 있지만 그 밑바탕엔 모두 정견과 바른 법에 대한 기억이 바탕이 돼 있습니다. 이것이 바탕이 되지 않고는 수행을 할 수 없다는 거죠. 좋은 것을 보면 까맣게 잊어버리고 다시 감각적 욕망으로 흘러가는 게 다 사띠의 힘이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법에 대한 바른 기억이 확립되면 어딜 가도 이 법이 작용을 할 수 있도록 역할을 하기 때문에 거기에 휩쓸리지 않습니다. 사실 수행에서 사띠는 가장 중심적인 의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기억하다는 뜻의동사인 사라띠에서 나온 사띠라는 용어를 쓴 거죠.
사띠는 탐욕과 성냄이 없는 기억이어야 합니다. 기억에는 과거에 있었던 쓸데없고 자잘한 온갖 것에 대한 기억도 있는데 이런 기억은 오히려 여러분을 괴롭히고 힘들게 만들죠. 그러나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에 대해 기억하는 건 향상으로 이끌고 성숙하게 합니다. 이런 기억은 바람직한 거지요. 바른 기억이라는 건 정념을 바탕으로 한 기억이에요. 대상에 대해서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들어가면 바른 기억이 아니라 삿된 기억으로 흘러갑니다. 예를 들어서 연예인의 사생활이나 과거의 상처에 대한 기억들, 꼭 기억하지 않아도 될 것들, 수많은 기억들과 삿된 기억은 버려야 될 것들이에요. 바른 기억을 부처님께서 삼마 사띠라고 한 겁니다. 올바른 기억이라는 거죠. 이런 바른 기억을 해야 하는 거지요. 우리가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서 몸에서 몸을 관찰한다고 할 때 몸에 대해서 망각하지 않고 거기에 머물러있을 힘이 있어야 할 겁니다. 몸을 망각하지 않아야 몸에 머물 테니까요. 이 망각하지 않게 하는 그 힘이 바로 사띠라는 거예요.
보통 세속에서 뭔가를 할 때는 대상에 달라붙어 대상을 콱 거머쥐고 그 일을 하도록 만들어주는 대표적인 게 뭡니까. 바로 욕심, 집착이지요. 집착을 가지고 대상에 달라붙어서 끝까지 딴 데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끌고 나가지요.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런 집착이 개입되면 안 되잖아요. 우리가 원하는 방향에서 대상을 붙들고 그쪽으로 가게 만드는 것은 바른 기억입니다.
-사띠의 특징과 역할
바른 기억이 작용하는 제일 대표적인 게 바로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아나빠나사띠anapanasati, 즉 들숨날숨을 망각하지 않는 것, 호흡수행의 핵심이에요. 들숨날숨이라는 것에 대해서만 명확히 잊지 않고 기억을 하고 여기에만 마음을 기울이는 것이 들숨날숨에 대한 사띠입니다. 아나빠나anapana라는 말이 들숨날숨이고 사띠라는 건 잊지 않고 기억하는 걸 이야기하거든요. 수행 주제를 정확히 기억하고 거기에만 마음이 가도록 해야 마음이 떠다니지 않는 거잖아요. 대상에 밀착해서 대상에 붙어있게 만드는 겁니다.
이것의 첫 번째 특징은 떠다니지 않는다는 거예요. 마음이 대상에 떠다니지 않고 대상에 머물러 있고 정착되도록 하는 것, 그래서 항상 마음이 거기에 갈 수 있도록 하는 거지요. 이것의 밑바탕에는 뭐가 있겠습니까. 잊지 않는 거, 기억함이 있어야 할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대상에 대해서 잊지 않고 계속 마음이 가야 그 대상에 대해서 속속들이 파악이 되겠지요.
‘청정도론’에서는 아나빠나사띠에서 대상을 말뚝으로 비유하고 우리 마음을 송아지에 비유해서 마음을 말뚝에 붙들어 매어주는 밧줄을 사띠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띠가 마음과 대상을 붙들어 매어주는 밧줄의 역할을 한다는 거죠. 결국 말뚝을 잊지 않는 겁니다. 말뚝을 잊지 않고 말뚝을 계속 기억하고 들숨날숨을 잊지 않고 들숨날숨에 대해서만 마음이 가도록 하는 게 바로 사띠가 하는 역할입니다. 사띠가 그렇게 어려운 이야기는 아닙니다.
사띠를 각성된 것, 깨어있는 것,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는 것으로 많이 쓰지만 이건 위빠사나 수행을 설명할 때 상당히 유효한 이야기이고, 혼돈의 여지가 있어 사띠 자체를 번역하는 언어로는 썩 좋은 언어라고 보기는 좀 어려울 것 같아요.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명확히 기억하고 그 가르침이 마음에 새겨진다는 의미에서 새김이라는 표현도 쓰지요. 우리 마음에 돌로 새기듯이 가르침을 새기면 어떤 대상을 만나도 부처님의 가르침이 바로 작용할 수가 있겠지요. 이게 소위 사띠가 작용하는 거예요. 우리가 잊지 않고 법에서 멀어지지 않는 거지요.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도 일어나는 무엇이든 관찰하면 된다고 하지만 사실은 이게 아니거든요. 어떻게 보면 관찰해야 할 그 대상에만 머물러야 하잖아요. 번뇌가 움직이면 방치하면 안 된다는 말이에요. 번뇌를 알아차리고 다시 원래 우리가 있어야 할 대상을 찾아 돌아와야 합니다. 번뇌가 움직일 때 번뇌에 휩쓸리지 않고 다시 알아차려 관찰할 대상으로 돌아오도록 하는 것도 다 사띠의 역할이라는 거지요.
그러나 이걸 알고 판단하는 것은 사띠의 역할이 아닙니다. 이것은 지혜의 역할입니다. 수행에서는 지혜, 그리고 식識의 역할입니다. 이것은 탐욕이다, 이건 뭐고 이건 무엇인지 꿰뚫어 아는 것은 지혜의 역할이지 사띠의 역할은 아니에요. 사띠는 대상을 잊지 않고 대상을 기억해주는 역할을 하는 거죠.
우리가 대상을 보고 대상에 대해 파악한 게 있을 겁니다. ‘아, 이것은 뭐다, 뭐다’ 이렇게 수행의 경험으로 이해된 것들이 있는데 이걸 바르게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음 수행에 적용을 할 수 있죠. ‘대념처경’에 삼빠자노 사띠마sampajano satimā라고 나오지요. 삼빠자노는 바르게 안다, 바르게 이해한다, 분명하게 이해한다, 분명하게 안다는 뜻으로 이건 지혜를 말해요. 분명히 안 것에 대해서 바르게 기억하고 바르게 잊지 않는다는 게 삼빠자노예요. 우리가 바르게 안 것에 대해서 잊지 않아야 세상에 대해서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거지요. 삼빠자노 사띠마를 중국에서는 정지正知 정념正念으로 번역을 했어요. 정지, 바르게 알고, 정념, 바르게 기억한다, 또는 바르게 숙지한다는 의미죠. 이렇게 수행을 하면 우리가 대상을 명확히 기억하기 때문에 다음에도 쓸데없는 대상으로 가지 않고 관찰해야 할 대상에 머물 수 있는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그 대상에 마음이 정착되는 거죠. 이래야 수행이 진보할 수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사띠는 첫째 대상을 명확히 기억해서 잡아주기 때문에 그 대상에 깊이 들어갈 수 있는 특징이 있고 잊지 않고 기억을 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을 보호해줄 수 있는 거지요. 바른 견해인지 아닌지 기억된 게 있으니까요. 불선법이 나타났을 때 지혜가 작용한다면 기억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잘못됐다고 파악할 수 있겠지요. 이래서 우리 마음을 보호해주는 역할도 합니다.그리고 사띠가 이런 작용을 하기 때문에 결국 지혜가 그 대상에 작용할 수 있어요. 사띠가 대상에 마음을 묶어줘야 지혜가 속속들이 파악을 할 수 있는 작용을 한다는 거죠.
결국 대상이 일어나는 것을 우리가 바르게 기억한다는 것은 좋아하고 싫어함 없이 있는 그대로 현상을 이해한다는 겁니다. 관찰된 대상에 대해서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들어가면 이건 벌써 번뇌가 일어난 거니까요. 바르게 이해하고 바르게 기억하고 잊지 않으면 이게 지혜가 성장해가는 과정이 되는 겁니다. 처음에는 그때그때의 정보들, 그냥 오온 자체에 대한 정보, 몸이나 느낌이나 이런 거에 대한 정보가 수집이 되겠죠. 정보가 수집되고 나중에 정보에 대해서 관계성을 이야기하면 이게 연기에 대한 이해와 조건에 대한 이해가 되고 이렇게 하면서 지혜가 성장하는 거예요. 지혜가 작용하기 위해서는 바르게 그 대상을 잊지 않는 것과 분명하게 마음에 새기고 기억하는 것이 전제가 돼야 합니다. 이걸 설명하자면 굉장히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오늘은 이 정도만 이야기하겠습니다.
사띠, 기억이라는 것은 굉장히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아난존자는 사띠의 힘이 엄청 강했기 때문에 부처님의 법문을 들으면 다 기억을 한답니다. 그 정도로 사띠가 강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기억만 있다고 해서 되는 건 아니에요. 여기에 지혜가 따라야 돼요. 기억된 것을 명확히 통찰하는 지혜가 같이 있어야 합니다. 아난존자는 기억력은 엄청 뛰어났지만 지혜가 약했기 때문에 부처님 돌아가실 때까지 수다원밖에 안 됐어요. 부처님 시봉하느라고 수행을 제대로 못 한 거죠. 사띠도 아주 약한 것부터 시작해서 부처님처럼 아무리 오래된 전생도 기억할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사띠까지 있고요. 또 현재 이 순간에 단 한순간도 번뇌가 일어나지 않을 만큼 대상에 밧줄처럼 붙어 확립돼있는 사띠도 있지요. 아라한들은 어떤 대상을 만나도 완전히 바른 기억이 확립돼있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도 번뇌가 일어나지 않거든요. 이렇게 사띠의 스펙트럼은 무한대예요. 아주 초보자가 가지고 있는 사띠와 아주 수행을 많이 한 사람이 가지는 사띠는 정도 차이가 엄청나다는 거예요.
사띠를 계발해서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확립돼있는 그 상태를 바로 염처念處, 빠알리어로 사띠빳타나saitpaṭṭhana라고 합니다. 빳타나는 우빳타나upatthana에서 온 말인데 확립됐다, 정착됐다, 흔들리지 않고 완전히 현존한다는 말이니까 사띠빳타나는 사띠가 그대로 지금 현재 드러나고 있다, 망각되지 않는다는 뜻이겠지요. 사띠가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도 작용하고, 사띠와 바른 앎, 지혜가 같이 작용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대념처경’ 마지막에 ‘알아차림과 지혜만이 현전할 때까지’라는 말이 나오죠. 어느 때나 알아차림, 소위 바른 지혜와 바르게 아는 것, 바른 기억, 또는 잊지 않는 것이 작용하기 때문에 아무리 밖으로 분별을 해도 중심에서 절대 망각되어지는 법이 없다는 겁니다. 법에서 절대 떠나지 않고 바른 견해에서 떠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게 정견이 확립되는 거고 정견이 확립되면 그게 바로 수다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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