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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보림사 댓글 0건 조회 1,326회 작성일 21-03-15 15:31

본문

인생난득(人生難得) 사람 몸 받기 어렵고  불법난봉(佛法難逢) 부처님 법(法) 만나기 어려우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상에서 아주 어렵고 희귀한 일 두 가지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地球)의 표면에는 수많은 생명체가 살고 있습니다. 그 많은 생명체 중에서 사람의 몸을 받고 태어나는 일은 참으로 어렵고 희유한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온갖 사상과 지식이 난무(亂舞)하는 복잡한 세상에서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만날 수 있는 인연 또한 희유한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같은 희유한 인연의 만남을「맹구우목(盲龜遇木)」에 비유하였습니다.  깊고 넓은 바다 속에 몸집이 큰 눈먼 거북이가 살고 있는데 이 거북은 100년에 한번 수면 위에 떠올라 숨을 쉬고 다시 바다 속으로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긴 세월을 기다려 물위에 떠오른 거북이가 육중한 몸을 의지할 수 있는 구멍 뚫린 널빤지(부목, 浮木)를 만나야 하는데 망망한 넓은 바다에서 이 것을 만나기란 쉽지가 않은 것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고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正法)을 만나는 것이 그처럼 어렵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다행히 그 어려운 관문을 통과해서 사람몸 받고 부처님 법을 만났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그런데 이 소중한 만남에 관해 우리들은 너무도 가볍게 생각하고 당연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살다가 이 생(生)이 끝나버리면 다음 생을 기대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따라서 남은 인생이라도 사람답고 부처님 제자답게 살도록 우리 모두 노력해야 합니다.

선대(先代)의 큰스님들이 소득 없이 허송세월 한 것을 후회하고 피 맺힌 탄식을 했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 있습니다.

  차신불향금생도(此身不向今生度)
  갱대하생도차신(更待何生度此身)
  금생에 이 몸을 제도 못하면 어느 생을 기다려서 이 몸 제도할 것인가?

이 짧은 글 속에 소쩍새의 피맺힌 울음소리 같은 한탄과 절규를 엿볼 수 있습니다. 천만다행으로 금생에 사람 몸을 받고 부처님 법(法)을 만났다 해도 견성(見性)하지 못하고 금생에 주어진 기회를 놓친다면 어느 생에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서 부처님의 대도(大道)를 성취하겠느냐고 절규(絶叫)하는 피맺힌 자탄이라고 생각됩니다.

스스로 불교인임을 자처하는 우리들이 아직도 부처님의 정법(正法)에 접근하지 못하고 겉돌고 있는 것은 큰 우려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진리의 말씀보다는 복권당첨을 기대하듯 요행수(僥倖數)를 바라며 복(福)을 비는 기복신앙에만 젖어 있습니다.

동기가 무엇이든 불교에 귀의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임을 아시고 이 것을 인연으로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에 눈뜨는 계기를 삼도록 노력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불교의 대의(大意)를 설명해 드리고자 합니다.

불교(佛敎)란 어떤 가르침인가?

우리는 주변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질문에『부처님의 가르침』이요 라고 단순하게 대답하는 사례를 흔히 보게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만족할 만한 답이 못됩니다

왜냐하면 불교라는 말속에는 그 이상의 깊은 뜻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 설명을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불교 할 때『불(佛)』자에는 깨달았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을 깨달은 사람이라 하고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 그래서 불교는 깨달음의 길이요, 깨달음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이 깨달음의 길(佛道)인 불교는 두 가지 중요한 뜻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 깨달음은 불교의 시작이요, 끝이라는 뜻이고, 둘째 모든 사람이 다 깨닫기 위해서 수행(修行)하는 종교라는 의미입니다.

부처님은 29세 청년기에 출가하셨습니다. 그리고 6년이라는 수행과정을 거치신 결과로 큰 깨달음을 성취하셨습니다.

이 깨달음의 순간에 고타마 싯다르타라고 하는 평범한 자연인(自然人)이 성자로서 부처님이 되는 순간이고 불교의 출발점 이 된 순간입니다. 이 점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불교의 대의(大意)를 이해 할 수 있는 중요한 대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내용은 무엇일까?
이 질문 또한 답이 간단치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깨달음은 그 자체가 아주 깊은 종교적 체험이어서 말이나 생각으로는 온전히 표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 컵의 물도 스스로 마셔 보아야 그 물맛을 알 수 있듯이 자신이 깨달음의 세계를 스스로 체험했을 때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깨닫지 못한 입장에서는 설명에 한계가 있고 어려움이 따릅니다.

그러함에도 부처님께서는 49년의 장구한 세월동안 미혹한 중생들을 위해 깨달으신 오묘한 진리를 일깨워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볼 수 있는 대장경(大藏經)이라는 방대한 양(量)의 경전들은 그 본래의 원천인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이정표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교리(敎理) 또한 깨달음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므로 교리자체로서 의의(意義)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 교리를 통해『깨달음의 세계』에 도달하는데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경전을 배우고 교리를 익히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최우선적인 과제는 지금 배우는 교리를 통해서 자신의 내면을 맑히고 깨달음 즉 성불도(成佛道)에 접근 할 수 있도록 실천이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메마른 지식(知識)을 쌓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되고 지혜(智慧)를 증진하는 수행(修行)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지혜는 현실적인 우리의 고통스러운 삶을 변화시키는 실천으로 이어져야 하며 배워서 안다는 것과 행(行)하는 것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불교공부를 효과적으로 하려면 ① 듣고, ② 생각하고, ③ 실천하는 문․사․수(聞思修)의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마음을 텅 비우고 조용히 듣고 받아들이는 지혜인 문혜(聞慧)입니다.

법문을 듣거나 경전을 읽어서 이해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것은 단순한 이해(理解)차원의 지식(知識)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 만족해서는 안되고 알게된 것을 소화시켜 자기 속에서 내면화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야만 깊은 차원의 이해가 가능합니다. 이것이 생각하는 지혜인 사혜(思慧)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사혜(思慧)가 나의 삶과 연결되어 깊은 사색과 관찰을 통해 바로 이것이었구나 하고 터득했을 때 비로소 그 지식은 내 것이 되고 바로 나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실천인 수혜(修慧)의 차원으로 승화 될 수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불교공부는『듣고 생각하고 이해한 것을 실천하므로써 구경의 목표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처음부터『인간문제로부터 출발하여 인간문제를 해결하는데 마치게 됩니다.』따라서, 불교에서는 처음부터 신(神)의 문제 같은 것은 전혀 거론하지 않습니다.

인간이란 본시 유한(有限)한 시간 속에 던져진 존재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면 늙고 병들면서 죽어갑니다.

또, 우리가 살고 있는 동안에도 뜻대로 되는 일보다 안되는 일 이 더 많아서 고통을 받습니다. 불교는 이러한 인간 실존(實存)의 모습을 괴로움(苦)이라고 진단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고통 속에 던져진 인간이지만 또한 이것을 스스로 해결 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이 불교의 입장입니다.

불교는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에 대한 신뢰(信賴) 위에 세워진 종교입니다. 비록 괴로움 속에 처해 있더라도 인간 스스로 그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능력(能力)을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간곡히 부탁하셨습니다.
『너 자신을 등불 삼고 너 자신을 의지하라 진리를 등불 삼고 진리를 의지하라 이 밖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되느니라』

여러분들이 들어서 알고 있는 법어(法語)입니다.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


이 말씀은 불교의 기본 정신을 잘 나타내고 있는 불교사상의 진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등불이 될 수 있는 능력을 본래부터 갖추고 있으니 그밖에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라고 하신 교훈입니다.

수행(修行)을 통해서 생사(生死)의 문제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얻은 부처님의 삶은 그대로 인간에 대한 신뢰와 무한한 가능성을 여실하게 보여주신 삶인 것입니다.

이같은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확신은 비단 인간 뿐 아니라『모든 생명이 다 여래(如來)의 씨앗이요, 여여한 부처님의 성품을 갖추고 있다는 가르침으로 이어집니다.』

마음과 부처와 중생은 다 똑같아서 어떤 차별도 없다(華嚴經 말씀)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마음이 부처요. 중생이 그대로 부처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능력과 가능성을 이 만큼 높이 평가한 가르침은 다른 어느 사상이나 어느 종교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중생이 바로 부처라고 하신 말씀』을 음미해 보아야 합니다. 중생(미혹에 빠져있는 존재)이 부처라고 한다면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칠흑 같은 어두움 속을 헤매는 우리들 중생이 부처라고 하셨으니 납득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미혹한 중생이지만 우리 중생의 본래의 성품은 맑고 원만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늘에 떠 있는 태양(太陽)도 구름에 가리우면 밝은 빛을 잃게 됩니다. 우리의 자성(自性)도 그러해서 본래의 기능과 빛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본 성품을 뒤덮고 있는 것은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라는 삼독(三毒)의 구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부처라는 사실도 모르고 부처님께서 말씀해 주셨는데도 실감하지 못하고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구름이 사라지면 태양의 밝은 모습이 드러나듯이 우리의 본 성품도 삼독의 구름이 벗어지면 본래의 밝은 제 모습을 들어내게 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거듭 강조하는 수행(修行)은 마음을 뒤덮고 있는 구름을 제거하는 노력이요 우리의 본 모습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여기에는 부단한 정진(精進)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자신의 마음이기 때문에 여러분 스스로가 닦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나의 마음을 다른 사람이 대신 닦아 줄 수는 없다는 얘기입니다.

이처럼 불교는 인간의 가능성을 스스로 실현해 가는『자기실현』의 종교임을 알아야 합니다. 참고로 불교의 특성을 다른 종교와 비교 분석해 드릴 터인즉 혼동 없길 바랍니다.

서양종교(기독교 같은 신중심의 종교)는 인간문제를 인간스스로 해결 할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절대적인 신(神)이 요청됩니다. 왜냐하면 신이 인간을 만들었다고 하는 것이 전제되기 때문에 신이 없이는 인간은 존재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은 창조주(創造主)이고 인간은 신이 만든 피조물(被造物)일 뿐입니다. 이러한 논리 체계에서는「종교는 신(神)과 인간(人間)의 관계」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피조물일 뿐 아니라 나아가서는 신의 뜻을 거역한 죄인(罪人)이라는 이해로부터 출발합니다.『신의 지음을 받은 존재, 죄를 지은 죄인으로서의 인간』은 창조주인 신에 의존하고 또 자신의 죄를 회개해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해야할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이 기독교의 입장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철저하게 신(神)에 의존해야 하며 구원(救援) 의 힘은 오직 신의 소관이고 특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의 인간은 피조물도 죄인도 아닙니다.
부처님과 똑 같은 성품을 갖춘 존재요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 할 수 있는 능력과 가능성을 가진 존재입니다.

 따라서, 불교의 수행(修行)은 인간이 갖고 있는 본래의 능력과 가능성인 부처님 성품을 깨닫고 실현해 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신(神)과 인간(人間)과의 관계』만을 종교라고 고집하는 종교관(宗敎觀)은 편견과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그런 말에 동요될 필요는 없습니다.

현대 종교학(宗敎學)에서는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종교현상학적인 접근을 통해서 종교는 신과 인간과의 관계가 아니라『성스럽고 거룩하게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불교는 교조이신 부처님과 똑같은『깨달음』을 모든 중생이 다 이루게 하려는 종교입니다. 우리가 희구하는 깨달음은 한마디로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설명 드린 것을 참조하시어 불교의 대의가 어디에 있는가를 바로 이해하시고 온전하고 자유로운 자기 확립에 정진하실 것을 당부 드리면서 강론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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